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읍시다 (1)
- hjpastor
- 5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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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승 목사(새 믿음장로교회 원로목사)
코리아 월드 종교 칼럼니스트
남부개혁신학교 명예 교수
필자는 오늘 에베소서 4장 25절-32절까지를 본문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읍시다”라는 제목으로 본 칼럼을 써 나가려고 한다. 본 칼럼을 오늘과 또한 다음 주간에도 한번 더 언급하려고 한다. 이 말씀은 지난 11월 17일(월)에 휴스턴 한인 목사회 월례회 모임이 서울 가든에서 있었는데, 그날 사랑하는 동역자들을 향하여 설교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에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하여 믿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그 때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을 본받기 위해서 몸부림쳐야만 할 것이다. 에베소서 4:24절에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을 옷입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옷입는 일일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첫째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본문 25절에 보면,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초두에 나오는 “그런즉”이란 의미는 헬라어 접속사 “디오”라는 말인데, 이것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림으로써 새 사람을 입었은즉”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옷입었은즉,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거짓말 하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그의 말 속에는 진실보다는 거짓 투성이들로 꽉 차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지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 본문에 보면 먼저는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말씀이 니온다. 옛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거짓”으로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이다. “거짓”이란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와 궤계”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에 “새 사람”의 특징이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들”의 특징은 바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인 것이다. 이 말씀은 스가랴 8:16절 말씀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상호간의 친교 가운데 솔직하고, 정직해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 8:16절에 보면,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배풀고”라는 말씀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필자도 이웃에 있는 목회자들이나 사랑하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친교를 나누게 되면서, 한번 거짓말을 한 것이 발견이 되고 나면, 그 뒤로는 목회자이건 성도들이건 간에, 그 사람하고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리져 버리고 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왜 이웃들과 더불어 참된 것만을 말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진실함으로써 서로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통한 상호간의 신뢰감 대신에, 거짓으로 인하여 생겨난 불신은 유기체를 분열시키고, 붕괴시키며, 파괴시키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들이 대부분 분열하는 이유가 성도들의 말에 진실성이 없고, 서로 거짓을 말하며, 서로 당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상대방 탓을 자꾸 하다가 보면, 교회가 분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본문 26절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란 말씀은 시편 4편 4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시편 4:4절에 보면,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이 말씀은 역설적인 명령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이 말씀 속에서 분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본문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명령과 본문 31절에서 “모든 분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나오기 때문에 역설적인 명령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권면의 말씀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5:22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씀 속에서도 “형제에게 노하는 삶”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갈라디아서 5:18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말씀 속에서도 보면, 분을 내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금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의분”을 내신 적이 있으셨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 내는 것을 금지시킨 이유는 분을 내게 됨으로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에서 분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분”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의 제한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 제한을 통해서 한밤중까지 분을 품지 않도록 함으로 죄에 빠지는 잘못을 막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서로 분이 나고, 서로 화가 난 상태에 있다 할찌라도, 그날 그날 잠자리에 들기 이전에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여러분이 가정 생활을 해 나가면서, 분이 아무리 나더라도 화가 아무리 나더라도, 그날 그날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풀고서, 서로 화목의 관계로 발전해 나가시기를 바란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기 위해서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에 함써야만 할 것이다.
본문 28절에 보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 8계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인 것이다. 여기에 “도둑질 하는 자”에 해당하는 핼라어 “호 클레프톤”이란 직업적인 “도적” 즉 “호 클레프테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당한 착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할 수가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깨끗이 모두 다 끊어 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도적질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서 빈궁한 타인들을 도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인 기독교적 노동 윤리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그 노동을 하는 목적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들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며,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우리도 이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지면 관계상 여기까지만 말씀을 드리고, 나머지 네번째와 다섯번째, 여섯번째의 말씀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힘쓰시기를 바란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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