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
- hjpastor
- Jun 30
- 4 min read
이인승 목사(새 믿음장로교회 원로)
코리아 월드 종교 칼럼니스트
남부개혁신학교 명예교수
오늘은 필자가 디모데후서 4장 6-8절까지를 분문으로 “의의 면휴관을 받을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본 칼럼을 써 내려가려고 한다. 여기 본문 8절에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에 나오는 “면류관”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티파노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던 것으로, 월계수나 상수리나무 등의 잎을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왕들이 쓰던 “왕관”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왕관”이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면류관”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면류관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계3:21).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면류관”이리고만 말하지 않고 “의의 면류관”이리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이란 뜻이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마는 성경 속의 다른 곳에서는 “영생”(딤전 6:12, 계 2:10)을 의미하기도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장래에 준비될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되었던 것으로 이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하는 소망이 바울에게 늘 용기를 주었던 것을 알 수가 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수여되는 이 면류관”이 우리를 위해 이미 에비되어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의의 면류관”, 즉 영생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확신하고 이것을 소망삼고 앞을 향하여 믿음으로 질주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이미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그 살아가는 방법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4:6-7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에서 “전제와 같이”라는 말은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 위에 붓는 일종의 “제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제주”를 붓는 행위는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서 바로 바울 자신의 희생적인 순교를 상징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예견하고서 남은 자기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온 교회를 위하여 산 제물로 순교의 제단에 바치겠다고 하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그 다음에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왔도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순교가 임박한 중대한 시점에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살아왔던 삶을 우리도 함께 닮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첫째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워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이 평상시에 즐겨 사용하던 표현인 것이다(골 1:29). 여기에서 “선한 싸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레슬링이나 권투와 같은 운동 경기를 말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 “선한 싸움”이란 바로 영적인 투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믿음과 관련한 어려움이나 유혹에 맞서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싸움이나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길을 따르려는 내면의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6:11-12절에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들을 멀리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들을 멀리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앞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바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딤전 6:9)을 멀리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딤전 6:10)을 멀리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으로 만족”(딤전 6:8)하고, 탐심을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서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게 되어서”(딤전 6:9), 결국에는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되기 때문이며, “돈을 사랑하는 것”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고, 돈을 사모하게 되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기” 때문인 것이다(딤전 6:10). 탐심이란 하나님과 그 분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자꾸 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심은 불신의 마음이며,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제물을 함께 설길 수 없다”(마태 6:24)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기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들을 버리고, 오직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끝까지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악과 싸우며 비진리와 싸우며 사단과 싸우는 선한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미리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둘째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고 잇다. “나의 달려갈 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바로 “드로몬”이란 말인데,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스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을 비유한 것으로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기의 사역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분투하면서 살아온 전생애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마치고”는 바울이 경주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왔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나 자신에세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중간에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애쓰고 분투하면서 남아 있는 생에를 신실하게 승리하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렇게 살아온 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줄로 믿는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이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을 지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군인이 상관에게 충성을 지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청지기로서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실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포지하지 않고, 그 신앙을 잘 지키다가 후대에 넘겨 주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 대한 확실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승리의 삶으로 주님 앞에 드려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가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한다.
사도 바울가 살아온 전생애의 삶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 나가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중도에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좌도 우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서 끝까지 신실하게 잘 강당해 나가며,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 중심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나가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렇게 살아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분명히 확신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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