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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사건 이후의 삶

이인승 목사(새 믿음장로교회 원로목사)

                                                                                                         코리아 월드 종교 칼럼니스트

                                                                                                           남부개혁신학교 명예교수


    우리는 지난 주일인 4월 20일 주일을 부활절(Easter, The Day of Resurrection)로 지켰다.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명절로서 타 종교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우리 기독교만의 독특한 절기가 바로 부활절인 것이다. 기독교 외에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도 부활절이라고 하는 특별한 절기가 없는 것이다. 부활절이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의 성도들이 부활 이후에 살아가야 할 삶은 바로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부활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찾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들이 바로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첫째로 부활 사건 이후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요한복음 20:19절에 의하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열 제자들에게 간절하게 소원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2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때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이미 이 세상을 떠났었고, 도마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이 때에는 열 명의 제자들만 있을 때였는데, 그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 “평강”이란 말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인데, “평화”, “화평”, “복지”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그들이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에, 서로 헤어질 때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 받는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에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 분의 평안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요한복음 14:27절에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평안 또는 평강은 바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 평강의 은혜는 성령 하나님께서 부활 사건을 확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요,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 평강의 은혜로 충만한 성도에게는 마음에 근심할 이유도 없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부활절을 맞이하여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분명하게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령께서 반드시 그 분들에게 “평강”의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마음에 근심이 있을 수가 없고, 두려움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강의 은혜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충만하게 넘치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항상 근심과 걱정으로 쌓여 있고, 두려움과 공포로 쌓여 있다면, 자기 자신을 철저히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주시는 평안으로 날마다 충만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부활 사건 이후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본문 20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마는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면서 무서움에 빠졌다고 한다. 누가복음 24:36-38절에 가 보면,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 주는 것이 요한복음의 장면인 것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서 기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을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눅 24:41-43).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것임울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것은 앞에서 주님이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 없는 양 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를 상상해 본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었겠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복음서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누가복음(24:39-40)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손 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분명하게 알고,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 드린다면, 그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하며, 위안이 충만하게 넘치게 될 것이다. 부활 사건 이후에 우리의 삶은 평강이 넘치는 것 뿐만 아니라. 기쁨과 위안이 충만하게 넘치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셋째로 부활 사건 이후에 우리의 삶은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의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에스겔 39:9절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평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 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고 하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 주는 것으로,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인 수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 속에 모신다고 하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서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하여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활 사건 이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뿐 아니라, 성령 충만함으로 전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사건 이후에 평강이 넘치며, 기쁨이 넘치며, 성령 충만함으로 넘쳐서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가면서, 고난과 부활의 순수한 복음을 만방에 증거하며 선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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