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요 21:19, 22). 주님은 베드로에게 “전진하라”고 명하시지 않고 분명히 “나를 따르라”(Follow me)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앞장 서시면서 그 뒤를 따르라고 하시는 명령인 것이다. 주님은 손수 십자가를 지시면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명령만 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삶의 본을 보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만 할까? 먼저는 우리가 마지막 승리를 믿고서 주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가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마는 주님께서는그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의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으로 마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요21:19).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생의 마지막 승리를 믿고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 뜻이다. 인생에 있어서 비록 실패와 수치의 순간이 있다 할찌라도 중요한 것은 마지막 인생의 결론인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 자신이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나를 상대방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최선이 아니라 이웃의 성공을 보고서 질투심이나 시기심으로 인하여 그 이웃과 나를 비교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무서운 적인 것이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의 영광스런 최후에 대해서 주님의 예언을 듣고난 후에 사도 요한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21;21).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독점하고 있는 요한을 경계하면서 요한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베드로에게 너에 대한 나의 계획과 요한에 대한 계획은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너의 은사에 집중하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내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셋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주님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는 사명과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명을 주셨던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만을 붙들고 말씀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서도 지금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 부르심 앞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록된 말씀만을 붙들고, 마지막 승리를 확신하고 의지하면서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미국의 목사인 제리 포엘이 멘하임 베긴이란 전 이스라엘 수상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포엘 목사가 멘하임 베긴 수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어려운 중동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셨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러자 베긴 수상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용기, 특히 지휘관의 용기 덕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전선에서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진”이란 말은 절대 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나를 따르라”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군의 승리하게 된 비결입니다. 위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지휘관이 앞장 서게 될 때에 승리할 기회는 오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도자가 먼저 앞장 서서 본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말할 때에 그들이 순순히 따라오게 되므로 주님의 복음은 효과적으로 증거되어질 것이다.
마태복음 16:24절에 의하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주님 자신을 따라가는 일을 위해서는 먼저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자기의 아집도, 고집도, 자기 성질도, 자기의 자존심도 부인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신다. 자신이 주님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남편을 질병으로인하여 세상을 떠나 보낸 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 된 아들들을 키우기 위해서 철길 가에 있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에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다고 한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다고 한다. 철길에서 두 아들들은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에 기차가 달려들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어졌다는 소리에 엄마가 일하다가 말고 뛰어나가 보니 두 아들들이 철길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두 아들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후에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고 한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천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주었던 그것이 아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찬송가 작사자 하버겔은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고 읊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있기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도자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며, 아끼며, 위해 줄 때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지도자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야만 한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였다면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몫에 태여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만 한다. 모든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삶의 본을 보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 지도자들은 내가 먼저 삶의 본을 보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되어야만 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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