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승 목사(새 믿음장로교회 원로목사)
코리아 월드 종교 칼럼니스트
남부개혁신학교 명예교수
필자는 오늘 에베소서 11-22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그 때에와 이제는”이란 제목을 가지고 오늘과 다음 주간에도 같은 제목의 칼럼을 써 나가려고 한다. 에베소서 2장 전체는 “그 때에” 즉 “예수를 믿기 이전의 비참한 상태”와 “지금” 또는 “이제는” 즉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후의 상태”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그 때에와 이제는”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는 “Then and Now”란 제목을 가지고 본 칼럼을 써 나가려고 한다.
첫째로, 우리는 그 떼에는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는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로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본다. 본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진술하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에 나온 “육체”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인 혈통과 중생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절의 “육체”는 신체적인 혈통이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베소 교인들이 과거에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이방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에드네”에서 관사인 “타”는 “경멸과 무시하는 조의 어투”로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을 소유하지 못한 자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그 다음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할례”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소속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무할례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자처하면서, 자신들을 “할례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기에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이란 소위 “할레당이라 불리는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무할례당”이라고 무시하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찬성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할례란 바로 외적인 표식이 아니라, 바로 마음의 할례인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빌립보서 3:2-3절에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진정으로 할례를 받은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몸을 상해해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할례파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므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자랑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할례파 인줄로 믿는다.
둘째로, 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성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여기에 “그 때에”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던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에베소 교인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란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이방인들은 국가적 출생의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갖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에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여기에 나오는 “언약의 역속들”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하신 언약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언약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는 말은 그 때에 우리는 언약과도 무관한 쓸모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 때에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의 우리들의 모습은 세상에서도 소망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고, 또한 하나님도 없는 불쌍한 자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두 눈을 부릎뜨고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철저히 무장하지 않는 다면, 교회들이 더욱 허약해 질 수 밖에 없다는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세번째로,그런데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기를 바란다. 본문 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에 “멀리 있던”이란 말과 “가까워졌느니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이방 국가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묘사하는 “라호크”란 말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가까운 것을 묘사하는 “카로브”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과거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상태에 대한 이와 같은 반전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그 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화해된 상태”로 바뀌게 된 것은 구약에서 유대교로의 개종으로 인하여 생긴 반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던 것보다도 더 큰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로운 피조물인 된 것을 확신해야만 할 것이다.
과거의 것들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우리는 이제 새 것이 되었고,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이제부터의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파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고백대로, 로마서 14:7-8절에 나온 대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는 정신과 신앙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때에와 이제는”에 대한 칼럼으로 첫 번째로 이 말씀을 생각하였다.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그 때에와 이제는”이라는 제목으로 에베소서 2:19--22절을 중심으로 칼럼을 쓰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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