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은 흔히 “대 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가 바로 여기 본문에 나오는 “제자도”임을 알 수가 있다. 필자는 여기서 데이비드 J. 보쉬가 쓴 <변화하고 있는 선교>(Transforming Mission)란 책을 주로 참고하면서 이 글을 펼쳐나가고자 한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이번 11월 1일부터 3일까지 교회 창립 19주년을 맞이하면서 태국 선교를 위해서 지난 1987년부터 약 32년 동안 헌신해 오신 강대흥 선교사를 모시고 <선교 비전집회>을 열려고 한다. 이번에 여는 집회의 주제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로 정하였다. <제자도>라는 주제는 마태복음과 마태의 교회와 선교 이해에 중심적인 것이다. “제자”라는 말은 특별히 교회론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동사인 “마쎄튜에인” 즉 “제자를 삼다”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 동사는 신약에서 단지 4번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3번은 마태복음에(마태 13:52, 27:57, 28:19), 그리고 1번은 사도행전 14:21에 나타난다.  이 동사인 “마쎄튜에인”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용례는 이 “대 위임령”(마28:19)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명령의 의미로 사용이 된 유일한 예인 것이다. “마쎄튜사테”, “제자를 삼으라”. 이것은 대 위임령의 주동사이며, 그 위임령의 핵심인 것이다. “세례를 베풀고”(baptizing)와 “가르치고”(teaching)란 두 분사들은 분명히 “제자로 삼으라”(make disciples)는 말에 예속되는 것으로, 제자 삼는 사역을 펼쳐 나가야 할 그 형태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의 전체적인 목적은 바로 “모든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그 수준에 까지 올려 놓는 것”이다.  

 “제자”란 용어는 다른 공관복음에서보다 마태복음에서 훨씬 더 중심적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용어는 마가복음에서 46번, 누가복음에서 37번 사용되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에서는 무려 73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는 사실 사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유일한 이름인 것이다. 가장 흔하게 “제자”와 함께 사용되는 동사는 “아콜루쎄인”, 즉 “따르다”란 말이다.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마태에게 “제자”란 표현은 단지 12제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 12제자가 항상 전제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덜 정확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해서 마태에게 처음 12제자들은 “교회의 원형”(the archetype of church)이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이와 같이 마태 시대의 “제자들”을 포함하도록 확대되는 것이다. 그의 복음서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교회의 복음”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처음 12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모습인 제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마테에게는 예수의 역사와 교회 시대 사이에 단절이나 불연속성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 공동체는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지난 날의 관계는 역사 그 이상의 것으로 전환되고 있다. 믿음이란 선생과 제자의 모범적인 역사의 끊임없는 재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 그의 복음서의 저작을 정당화한 것은 정확하게 예수의 역사와 그의 시대의 교회의 삶, 둘 사이의  필수적인 변증법이라고 보쉬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 교회의 원형이라는 12제자들의 개념은 많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마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5: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한 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인 것이다(마5:13). 그들은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복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마5:9), 천국의 아들들이다(마13:38). 그러한 아들들로서 그들은 서로에게 아델포이(형제들)이며(마5:22, 23, 24, 47,18:15, 21,35, 23:8), 또한 서로의 종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마태 시대의 “제자”는 처음 12제자들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후대의 그리스도인들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그 선생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홀로 따르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제자들의 공동체의 한 지체이면서, 몸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제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삼기 위해서 필자가 지금까지 약 40여년 동안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달려 왔다. 문제는 필자 자신이 온전한 제자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도들을 제자 삼기 위해서 달려 왔다고 하는 것이다. 목사로 갓 안수 받았을 때의 필자의 나이가 겨우 스물 여섯의 나이였는데, 그 때의 필자의 모습이 얼마나 예수의 제자다운 제자의 모습이었겠는가? 군목으로 군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30대의 젊은 나이에 담임목사로 사역할 때의 필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철없는 목사요, 열정은 있으되 혈기가 많은 목사요, 모자란 모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매우 설익은 목사였던 것이다. 설익은 감을 따서 먹으면 그 맛이 매우 뜨릅고 별로 맛을 모르고 먹을 수 밖에 없다. 그처럼 설익은 목사였던 것이다. 서울에서의 십 일년 동안의 담임 목회를 정리하고서 마흔 한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들어와서, 약 5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마흔 여섯의 나이에 휴스턴에서 교민 교회를 처음으로 개척하였는데 그 때에는 물론 처음보다는 조금 나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있었지마는, 역시 생각하는 것이 아직도 어리고, 스스로 잘난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충돌하기를 좋아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은 있으되 아직은 원숙하지 못한  부족한 모습들이 많은 목사였던 것이다. 그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오십대에 접어 들고, 이제 육십대의 중반에 들어서게 되니, 이제는 성격도 조금은 많이 누그러지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전보다는 조금은 더 온전한 원숙함을 향해서 달려 나가는 목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는 말씀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서 복음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맡기신 목양의 길을 위해서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다.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는 말씀을 붙잡고 지속적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갈 것이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순수하고도 정결한 믿음을 지켜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온전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신령한 존재들인 것이다. 세상의 육적인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인 것이다. 이번 집회 기간 동안에 강 선교사님의 증거되어지는 말씀,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들을 삼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대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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