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문기 (1)—-어머님을 뵙는 즐거움

한국 방문기 (1)—-어머님을 뵙는 즐거움

    필자 부부가 지난 7월 8일부터 20일까지 약 13일간 한국을 방문하고서 무사히 돌아왔다. 한국에 방문하여서 필자가 느낀 점들을 세 번에 걸쳐서 적어 보려고 한다. 필자가 미국에 들어 왔던 때가 1995년 1월의 일이니, 벌써 24년 째 세월이 흐르고 있다. 지난 24년 동안 우리 한국은 눈부시게 발전된 것이 사실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역 지역마다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백화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것을 볼 때에 이제는 농촌이건, 어촌이건, 도시이건 간에 거의 다 평준화가 되어서 골고루 발전된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전국의 도로망도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서울에서 강원도 양양에 가는 길도 너무나 잘 만들어서 승용차로 약 3시간 만에 갈 수가 있었다. 필자가 익산에서 광명까지 가는 KTX 기차를 탄 적이 있는데 약 50분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KTX 기차와 고속버스와 택시 아니면 수도권에서는 전철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으니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물질적인 발전은 매우 잘 된 반면에 정신적인 면에서는 과거의 1990년대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는 우리 한국이 과거보다도 퇴보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볼 때에 우리 백성들이 너무나 헤이해져 있어서 국방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약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지난 번에 삼척에 북한의 목선이 정박하였을 때에 우리나라의 육해공군들이 모두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3일만에야 그것도 주민들의 신고로 알게 되어서 조치를 취하였다고 하니, 나라의 국방에 대한 인식이나 반공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많이 헤이해져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교회들도 과거와 같이 필사적으로 기도하며, 필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모습들이 사라진 것 같아서 서슬프기 그지 없다. 

    필자 부부는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서 첫 날을 부천에 있는 동생 집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인 수요일에 지방에 계신 어머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1931년생이시니 현재 미국 나이로88세이시다. 노인아파트에 기거하시는데 일어나서 밖에 나가기만 하면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계시니 신나게 사람들을 만나시고,  교제하시고, 노인정에도 가셔서 여러 가지를 배우기도 하시는 모습들을 볼 때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년 전에 어머니의 건강 상태보다도 훨씬 더 좋아지신 모습을 보게 되니 마음이 너무나 즐거웠다. 교회에 출석하시는 일도 매 주마다 주일 예배와 수요 저녁예배를 정기적으로 참석하시고 계셨다. 게다가 금요일에 모이는 구역예배에도 거의 다 참석하시는 것 같았다. 건강의 비결이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서로 대화하며, 서로 교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필자의 어머니는 만 80의 나이에 이미 고인이 되신 이상욱 장로님을 만나서 결혼을 하시고, 1954년도에 먼저 저를 낳으셨다. 그 후에 남동생들을 줄줄이 3명을 더 낳으셨다. 4형제만 낳으셨으니 다른 어머니들보다 고생을 더 많이 하셨다고 본다. 필자의 부모님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즐거움으로 기도생활을 많이 하시던 분들이시다. 매일 새벽기도하는 일과 금요철야기도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랐다. 4형제들과 9명의 손주들이 모두 다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은 모두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라고 본다. 4형제들 중에서 맏이인 필자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 기도를 하시고 낳으셨기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는 것이 의당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 부모님의 얘기에 의하면, 필자가 3살, 4살 때에 우리 집에 사람들이 오면 붙잡고 안수기도를 해 준다고 머리에다 손을 언고서 “주여! 고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는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시늉을 하였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필자가 중학교까지 잘 나가다가 고등학교 때에 3년 동안은 부모님께 반항을 하면서 부모님의 원하는대로 목사가 되지 않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겠다고 우겼으니 부모님들은 그 마음이 많이 상심되셔서 기도만 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1973년 필자가 김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2월에 시골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다. 서울에서 강사로 오신 목사님의 은혜가 충만한 설교를 월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5회에 걸쳐서 들었고, 낮 공부 시간에도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번을 참석하여 말씀을 들었고, 새벽기도회는 화요일 새벽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5회에 걸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이렇게 14번의 은혜로운 설교들을 들으면서 필자는 하나님이 부족한 종을 부르셨다고 하는 분명한 소명감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약 15분 정도의 성도들이 난로가에 모여서 철야를 하면서 합심기도를 하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간증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었는데, 필자는 그 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제가 이번 집회 때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다고 하는 소명감을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부족한 종이 주의 종이 되어서 주님의 복음만을 증거하면서 살겠습니다”, “이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복음만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나라에 가겠습니다”라고 간증하였다. 그 때 필자의 그 간증을 들으셨던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토요일에 강사 목사님을 따라 전주로 이동하여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신학대학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보기 좋게 합격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신학교도 졸업하고, 7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1980년 2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여기까지 약 39년째 복음만을 위해서 달려 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다. 연로하신 필자의 어머님은 필자가 국제전화를 드릴 때마다 “나는 너희들에게 줄 것은 없지마는, 너희들과 너희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위해서, 형통하기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는 모습에 감동이 된다. 매 격년마다 어머님을 뵙는 즐거움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마음이 너무나 기쁘고, 가슴이 설레인다. 필자의 어머니가 외할머님이 사셨던 96세까지 건강하게 사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사신다면 하나님 앞에 더더욱 감사한 일이고……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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