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능력

구원의 능력

그 동안에 필자는 앞에서 기도의 능력과 찬송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다루어 왔다. 오늘은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에 대하여 다루기 위하여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언급해 보려고 한다. 히브리서 11:1절에 의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식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못보고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을 열고 받아 들이면 우리의 삶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고,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으며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2:3절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a great salvation)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여기에 보면, 예수의
구원의 능력을 “큰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말이 갖는 보편성 때문에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성경에 보면 큰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 통상 “구원받았다”라고 말한다. 큰
고통의 문제나 질병에서 해결되었을 때에도 구원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능력을 “큰
구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분의 능력이 단순히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우리의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의 능력은 그보다 더 큰 능력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능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 주는 능력이요, 우리에게 절대적인 생명을 주는
능력이요, 또한 죄와 사망을 완전히 깨뜨리시는 능력인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능력을 가진 우일한 종교이다. 우리 “기독교” 말고는 이 세상에 구원의 능력을
가진 종교는 아무 종교도 없는 것이다(사도행전 4:12, 요한복음 14:6). “쿠퍼”라는 시인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비운의 생애였었다. 한번은 너무 절망한 나머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을 하고 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실행하지 못하고 돌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비통한 심정은 그에게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가 다락방에 올라가 석가래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어 뛰어 내렸지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서재로 들어가서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칼을 자기 가슴에 대고 앞으로 넘저졌지만 칼빗대만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 그는
또다시 실패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 밤 늦게 쓴 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갑자기 방안에서 주님의 모습과 그의 사랑이 충만함을 느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외쳤다.
“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여!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영혼을 구원하여
주소서!” 그러자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생명과 소망이 솟아남을 느꼈다. 이제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내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간증인
것이다.
로마서 1:16-17절에 의하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복음을 위하여 살았다. 그것은 그가 복음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복음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복음에는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으며, 복음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빌립보서 3:7-9). 그는 누구든지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믿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도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었으며, 헬라인에게도 구원의 능력임을 분명히
믿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복음을 결단코 부끄러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자랑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요즈음은 예수 믿는 일이
당당하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가 처음 들어가던 그 시대에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로마에서도
그랬고, 우리 한국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당시에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다 놔두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켜서 우리를 구원하셨느냐고
따지면서 그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복음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교회들 마다
십자가를 높이 걸어 놓고 있다. 제단에도 십자가를 걸어 놓고 있다. 심지어는 목에도 십자가를 걸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의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로마인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언도하지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약소민족 중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다. 그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복음을 전하였다. 힘의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에 무력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외쳤던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다. 이 세상에 능력들이 많이 있지마는 구원의 능력만큼 위대한 것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기독교는 유일하게 구원의 능력이 있기에 우리가 바울처럼 결단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썩어질 대로 썩어져 가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운 이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능력인 복음을 전파해야만 한다. 복음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복음은 세상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이요, 예수의 복음이요, 능력의 복음이다. 복음은
천국을 소유케 하는 능력이 있으며,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추호라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이 복음을
자랑하며, 이 복음을 널리 세상 끝까지 선포해야만 한다. 우리는 끝까지 구원의 능력을 붙잡고,
구원의 능력을 외치며, 불신자들이 구원의 능력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구원의 복음을 증거해야만

한다. 결국에 복음이 구원의 방편이며, 복음은 능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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