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에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삶

마지막 때에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삶

오늘은 베드로전서 1: 17-21절을 중심으로 “마지막 때에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삶”이란
제목을 가지고 본 칼럼을 써 나가려고 한다. 지금 시대는 말세 지말이라고 한다. 이 뜻은 말세
중에서도 말세라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의 되어 가고 있는 현상들을 볼 때에
전쟁의 연속이요, 기근과 지진과 토네이도 혹은 허리케인과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한 핍박과 환난과
고통과 사랑의 식어짐 등등 과히 주님이 오실 날이 급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은헤를 사모하면서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
첫째로,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만 할 것이다.
본문 17절을 보면, “외로모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먼저 여기에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외모로
보시지 않고”란 말은 헬라어로 “아프로스 플램프로스”라는 말인데, 이 뜻은 “얼굴을 본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편견에 사로 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구약 시대에 생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보살피시는 분”(마6;32)과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눅18:1-7)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보면,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나그네로 있을 떼”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천국임을 명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천국 시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동안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영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18절과 19절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행실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은 귀한 존재들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헛된 행실”이란 말은
유대인들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기 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헛된”이란 말은 구 성경에서는 “망령된”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바로 헬라어
“마타이아스”로서, 이것은 이방 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서 사용하는
말인 것이다. 이런 헛된 행실, 즉 망령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뜻인 것이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엘뤼트로데테”로서 이것은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다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값을 지불하고 산다”고 하는 뜻이 있다. 다른
하나는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이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구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함을 받기
위해서 치른 댓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이나 은과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 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댓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진술은 “값없이” 구속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는 상반되는 것러럼 보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는 다르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 완전하여서 핏값을 지불하고 사셨다고
하는 것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고 하는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사야 선지자는 비벨론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고 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값없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5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핏값을 지불하시고, 나 자신을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하셨음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 주님이 해방시키셨다고 하는 이 중대한 사실을
날마다 확신해야만 할 것이다.
에베소서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으로 믿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할 것이다. 히브리서 10:18절에보 보면,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또 다른
그 무엇이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한다. 또 다시 무엇이 더 이상 필요치
않도록 우리 주님이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할 일이 아무 것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 영원한 구속을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로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본문 20-21절에 보면,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이 문구를 통해서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서, 다음 네 가지의

사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 즉 말세에
이르기까지 신실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둘째로는,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는 핼라어로 “완료 수동 분사”로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하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에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는
헬라어의 의미가 부정과거 수동분사로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하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내용 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미리 알리신
바”라는 헬라어 “프로 에스노스 메누”와 “나타내신 바”라는 헬라어 “파네르 덴토스”가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우리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파기할 수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 전”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을 이미 계확하셨으며, “말세” 즉 “종말의 때”에는 구속을 완전히
완성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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